[2021.01.08 기록] 글씨의 추억 by jack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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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ck8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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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08 기록] 글씨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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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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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어느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당뇨로 수척해지신 외할아버지를 뵈러 먼 외가집을 다녀온지 불과 두 주만의 일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특별히 보고 싶다고 부른 손주가 바로 나였다. 외사촌 형들이 둘이나 있었으니 어린 생각엔 그저 내가 더 멀리 산다는 이유로 부르신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임종 전 나를 찾으신 이유는 전혀 다른데 있었다.

"지금처럼 늘 글씨를 바르게 쓰며 살거라"

뼈만 앙상히 남은 외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며 남기신 유언이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내게 이 유언을 남기신데는 사실 남모를 이야기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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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딸을 줄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신 외할아버지께서 아버지와의 결혼을 허락한 계기는 바로 명필이었던 아버지의 글씨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일언지하에 아버지를 잘라낼 요량으로 종이와 펜을 주며 '아버지 함자나 한 번 적어보게'라는 외할아버지의 주문에 무릎을 꿇고 땀을 뻘뻘 흘리던 아버지가 한자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눈이 휘둥그레진 외할아버지는 연신 어르신들의 함자를 한자로 써보라 시켰고, 그 글씨에 탄복한 나머지 끝내 가장 사랑하던 딸과의 결혼을 승낙했던 것이었다.

세월이 지나 꽤 많은 손주들이 생기고, 대개 초등학생이던 그 손주들이 여름방학 내내 모두 모여 외가집에 머문적이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지만) 외할아버지는 숙제로 틈틈이 써야했던 우리의 일기나 탐구생활을 꼬박꼬박 챙겨보셨다. 그리고 유독 나의 글씨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명필 사위와 그 못지 않은 명필의 딸내미 사이에 낳은 손주가 기대한대로 또박또박 글씨를 쓸 줄 아니 무척이나 흐뭇하셨나 보다. 외할아버지는 그다지 이쁘지 않은 당신의 글씨를 늘 아쉬워하셨고, 또 글씨야 말로 사람의 마음가짐과 성품을 나타내는 거울이라 보셨던 분이셨다. 그러니 또래에 비해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응당 나를 이뻐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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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중학교에 올라가면서였다. 바른손이나 아트박스 같은 당시 팬시 제품에 어울리던 (여학생들의) 이쁘장한 손글씨에 눈이 가면서 서예나 펜글씨 쓰듯 반듯했던 글씨체가 이도저도 아닌게 되며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 스스로는 그럭저럭 글씨를 쓴다고 생각했지만 무엇보다 글씨에 예민했던 어머니부터 나의 새로운(?) 글씨체를 못마땅해 하셨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글씨 안에 올곧게 직선을 뻗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건물로 치면 곧고 단단한 지붕이 없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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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입대를 하게 되었다. 앞으로 펼쳐질 군생활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맘껏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했다. (술먹고 노는건 말할것도 없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책도 못읽고 공부도 못하겠지만 글씨는 쓸 수 있겠구나. 어디든 낙서하듯 쓸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언제든 글씨는 가다듬을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30개월의 군생활 동안 글씨 하나만큼은 고쳐서 나와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글씨에만 집중할 수도 있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훈련소에서 처음 편지지를 받았고 부모님께 보내는 첫 편지에서 부터 글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약 10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특기대로 원래 가야할 곳이 아니라 두 달간 한시적으로 식당일을 보게 되었는데, 이는 때마침 방위제가 없어지면서 부족한 T.O를 일반병으로 땜질하던 이유였다.

새벽부터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며 왠종일 일을 해야 했는데, 점심 설거지를 끝내고 잠시나마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신문지에 손에 잡히는대로 볼펜을 들어 글씨 연습을 했다. 짬이 나는대로 끄적였지만 두 달 정도 시간이 지나니 제법 글씨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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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의 파견(?)이 끝나고 본대 소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전에 기타리스트가 된 방병장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마침 같은 중대에 정말 글씨를 잘쓰는 고참이 있었다. (방혁 병장도 글씨 하나는 참 이쁘게 썼던 기억이 난다)

'탁병장'이라 불린 고참은 신기하게도 여러 종류의 글씨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었는데, 마치 워드프로세서에서 글씨체를 고르는 것처럼 고딕체, 명조체, 궁체, 필기체 등등의 서체가 있었던 것이다.

글씨에 관심이 많고, 그 다양한 글씨체를 우러러(?) 보던 내가 기특했는지 탁병장은 틈틈이 내게 글씨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물론이고 내게 많은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개그맨 뺨칠만큼 재밌고 입담 좋은 탁병장이었지만 내가 그의 글씨를 본뜨며 한땀한땀 써내려 갈때 코치하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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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를 하고나니 세상은 더욱 컴퓨터로 글을 쓰는 세상이 되어 있었고, 학교에서도 워드로 작성한 리포트가 아니면 취급을 안하는 문화가 깔려있었다. 글씨를 쓸 기회가 많이 사라졌고, 인터넷 세상에 이메일 쓰는 것이 보편화 되면서 손글씨는 더욱 요원해졌다고나 할까.

처음 글씨 연습을 할 때 가장 원했던 것은 거친 갱지와 사각거리는 연필이었지만, 환경이 여의치 않아 신문지에 모나미 볼펜을 집어야 했다. 연필로 기초를 잡고, 샤프와 볼펜을 거쳐, 만년필로 마무리하려던 계획은 쉽사리 완성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때 짧은 시간이나마 글씨에 신경을 쓴 덕분에 필요하다면(?) 그런대로 글씨를 멋드러지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며, 하늘같던 일병(?) 고참의 연애 편지를 대신 써주던 추억도 쌓았고, 전혀 다른 사람의 글씨처럼 보이는 여러 필체를 득하게 되었으니 나름 보람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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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손 맛'을 느끼는 시대가 왔다. 어떤 다큐멘터리 방송처럼 AI가 득세하는 시대에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다. 손으로 감촉을 느끼며 컨트롤 해가는 재미. (남자들이 많이 하는 당구 맛이 이런걸까?) 이런 재미를 다시 느껴볼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나무의 다른 모습인 종이, 위에 흩뿌리는 흑연, 사이를 지탱하는 나무의 촉감. 당분간 사각거리는 소리와 촉감을 느끼며 한 때 글씨에 신경쓰며 지루함을 이겨냈던 추억을 소환해봐야겠다. 비록 글씨 쓰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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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ngel ·
손글씨 그리운 추억이 되었네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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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행복한 💙 오늘 보내`소`~! *^^*
우리 스티미♨ 위로 가이`소`원~! 힘차게~!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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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ngel ·
이 포스팅이 스판 SCT 사이트에선 보이지 않아유~! ㅠㅠ
또 뭔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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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blue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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