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단어의 무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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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6일 악어 떼가 득실거리는 늪 외줄 위의 광대가 굴러 떨어졌어. 광대의 이름은 아프리카의 르완다라는 나라였단다. 벨기에의 식민지였던 이 나라 국민은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과 소수의 투치족으로 구성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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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투치나 후투나 언어적·문화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데 벨기에 식민 통치를 겪으면서 서로에게 칼을 가는 사이로 변했지. 역사 속 지배자들이 항상 써먹던 수법, “분열시켜 지배하라”는 계략이 르완다에도 어김없이 적용됐고, 벨기에가 식민 지배의 도구로 써먹은 종족이 투치족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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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이전부터, 그리고 독립한 이후로도 두 부족은 계속 옥신각신했고 피차 피를 보는 일이 잦았지. 1993년 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불안한 외줄 타기가 시작됐어. 그러나 1년도 못 가서 후투족 출신 대통령 하비아리마나가 탄 비행기가 누군가 쏜 미사일에 맞아 떨어지면서 비극은 시작됐어. 아니 표현을 바꿀게. 비극이 수면으로 떠올랐다고 하자. 이미 비극은 야금야금 준비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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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암살 전부터 “투치족을 몰살시키자” 따위의 혐오 발언(hate speech)은 후투족 출판물이나 신문, 방송을 통해 반복되고 있었어. ‘혐오 발언(표현)’이란 무엇일까? “국가·인종·종족·종교를 기준으로 자기가 속하지 않은 다른 그룹에 있는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파괴시킬 목적으로 악의적인 증오심을 부추기는 선동 행위”(박선기 변호사)라고 말할 수 있어. 후투족 미디어들은 ‘투치족을 몰살시키자’는 혐오 발언으로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하던 르완다의 발목을 물어뜯고 있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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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추락 직후 르완다 대통령 경호원들은 근처 투치족부터 살해하기 시작했고, 투치족뿐만 아니라 공존을 주장하던 온건파 후투족까지 공격하게 돼. 후투족이지만 온건파에 속했던 여자 총리도 그녀를 경호하던 유엔군 소속 벨기에군과 함께 죽임을 당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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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군인이 피해를 입자 벨기에는 옛 식민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말든 군대를 빼겠다 선언했고, 다른 나라도 앞다퉈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2000명 정도로 르완다의 질서를 유지하기엔 터무니없이 적었던 유엔군 병력은 그나마 10분의 1로 줄어버렸단다.
후투족 민병대는 수도 키갈리를 비롯해서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투치족을 색출하기 시작해. 그때 그들을 극도로 흥분시키고 부추기고 나아가 더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게 한 것 역시 미디어였어. 특히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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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텔레비지옹 리브르 데 밀 콜린’ 줄여서 RTLM, 우리말로 하면 ‘1000개 구릉의 자유 라디오 TV 방송’쯤 되는 뜻이지. ‘1000개의 구릉’은 산이 많은 르완다의 별칭이었는데, RTLM은 이 1000개 구릉 전부를 피의 바다와 살의 언덕으로 채울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방송을 끊임없이 내보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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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가(정글의 나무와 풀을 벨 때 쓰는 칼)와 총을 들고 일어나라. 바퀴벌레들을 몰살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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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투치족을 멸시하여 부르는 말이었지. 말을 하고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아는 사람을 ‘벌레’로 부르고 몰살을 선동한 거야. 심지어 ‘잘못된 뿌리를 뽑아라’며 저주도 해. 아이들까지 죽이라는 얘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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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냥 죽여라만 외친 게 아니야. 그들은 교묘하게 투치족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켰고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함을 강변하기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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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사람들이 내게 왜 모든 투치족들을 미워하느냐고 물으면 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시오.’ 투치족은 벨기에 식민 지배의 협조자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후투족의 땅을 빼앗고 우리를 채찍질해댔습니다. 그들은 바퀴벌레이고 살인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방송은 음산한 충고로 끝난다. “깨어 있으십시오. 당신의 이웃을 조심하십시오.”
순박한 농부, 친절한 교사, 엄숙한 목사가 라디오 방송의 주문에 사로잡힌 좀비가 돼 칼을 휘둘렀어. 사랑을 절대 계명으로 하는 기독교도도 예외가 아니었지. 가톨릭 신부 아타나세 세롬바는 투치족 수천명이 피신해 있던 성당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그들 모두를 학살했어. “르완다 교회와 성당에서 살육을 목격하지 않은 십자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어떤 성직자들은 투치족을 숨겨주는 척하다가 후투족 민병대에 넘기기도 했다니 예수가 하늘에서 “르완다! 르완다! 나마 사박다니”(르완다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라고 통곡했을지도 모르지. 예수가 천국에서 피눈물 흘리며 맞이해야 했던 르완다의 불운한 영혼은 단 3개월 동안에 80만명 이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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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지? 역시 아프리카는 머나먼 땅인 것 같고 거기 사는 사람들은 우리랑은 아주 다른 사람들인 것 같지?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야. 우리 한국인은 르완다 사람이랑 닮은 구석이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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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한국 정부가 내린 명령 가운데 하나는 ‘보도연맹’, 즉 왕년에 좌익 활동을 했거나 동조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바른 길로 인도’한답시고 정부 스스로 조직했던 단체의 구성원들을 죄다 학살하라는 것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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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좋던 동네 파출소 순경이 그저께 함께 장기 두던 사람의 머리에 총알을 박았고, 어떤 공무원 사위는 “저 노인은 좌익!” 소리에 꼼짝도 못하고 자기 장인이 죽음의 길로 가는 걸 지켜봐야 했어. 십수년 전 아빠가 대구의 학살 현장을 찾았을 때 동굴 안에는 딱 봐도 어린아이로 보이는 희생자의 두개골이 널려 있었단다. 당시 ‘공산주의자’란 바로 르완다에서 말하는 ‘바퀴벌레’였던 셈이야.
사태 수습 후 르완다의 학살범들은 국제사회의 재판을 거쳐서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 르완다 대학살을 심판한 국제사법재판소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바로 앞서 말한 혐오 발언, 즉 증오 선동을 일삼아 대학살에 기름을 끼얹은 언론인에 대한 처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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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RTLM의 설립자 페르디낭 나히마나, 격월간지 <캉구라> 주필 하산 은게제, RTLM 운영위원회 이사 장보스코 바라야그위자 같은 사람들은 징역 3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단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움의 유포와 선전을 통해 후투족 주민을 살인의 광란으로 밀어넣어 르완다 대학살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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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악마로 만드는 두 가지 재료는 공포와 분노야. 관동 대지진 후 일본인이 조선인을 학살한 것도, 우리 현대사에서 좌익이든 우익이든 서로를 ‘싹쓸이’하겠다고 덤빈 이유도, 르완다 대학살의 ‘길을 닦은’ 것도 “저놈들은 나쁘다”와 “저놈들은 무섭다”의 결합이었고, 결국 “저놈들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악마의 뿔에 도달한 거란다. 분노와 공포를 퍼뜨린 언론인의 죄는 그래서 가볍지 않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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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쯤 전에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에 올린 글이다. 나는 이제 고3이 된 딸 아이에게 이렇게 덧붙여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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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 "우리가 아프리카하고 같으냐. 우리는 위대한 촛불혁명을 이룬 시민 정신 드높은 국민들이다." 부정하지 않아. 어떻게 역사도 문화도 정치적 전통도 다른 나라를 다른 나라에 ‘대입’할 수 있겠니. 그러나 칸트와 헤겔의 나라, 마르크스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나라와 그 국민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들 역시 셈해 볼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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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에는 이미 수많은 혐오 단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또 주장하지. 그 단어의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고 해악성이 입증되며 그들은 퇴치돼야 하고 박멸돼야 하며 몰아내야 할 대상이라고. 나는 그 맥락을 따지고 해악성을 논의하며 퇴치, 박멸, 추방의 가함과 불가함을 논하고 싶은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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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단어의 특징은 그 범위가 결코 좁아지지 않고 넓어진다는 데 있다. 22년 전 김대중을 지지한다는 아빠에게 한사코 아버지 고향과 어머니 고향과 처갓집 소재지까지 묻던 부산의 택시 기사는 아빠를 ‘깽깽이’로 몰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 김일성이 좋아요 싫어요?” 묻던 식당 주인 아저씨는 아빠를 ‘빨갱이’로 낙인찍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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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왜구라는 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확장 가능하고 낙인의 무게가 가볍게 흩날릴 수 있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그 새끼도 빨갱이였어.”와 “그 사람 알고보니 깽깽이더만”과 “그렇게 주장하니 토착왜구”라는 어법은 다른 구석보다는 닮은 구석이 더 많은 쌍둥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르완다 후투족의 ‘투치는 바퀴벌레’와도 그렇고. 그래서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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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얼마나 악했고 그에 부역한 자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논외다. 현재 존재하는 말로도 충분히 그들을 비판할 수 있다. 혐오단어를 굳이 양산하지 않고도 말이야. 그리고 바로 후투족의 혐오 선동은 그렇게 이뤄졌다. "투치족이 벨기에 통치 때 어떤 일을 했는지 아나? 그 바퀴벌레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