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두깨 선생님 안녕히 by sanha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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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ha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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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두깨 선생님 안녕히
004년 10월 11일 홍두깨 선생님 안녕히



내 동심과 성장기의 영혼의 지배자는 바로 '미드'와 '재패니메이션'이었다. '6백만불의 사나이' '에어울프'와 'V'까지 주말의 프라임 타임을 도배했던 미국 드라마는 가히 소년의 꿈과 야망과 상상력의 견인차였고, '날아라 태극호'부터 '은하철도 999'에 이르는 재패니메이션은 나의 동심 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그런데 아주 어린 시절의 나는 미드든 재패니메이션이든 나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착각했다. 브라운관 속 주인공들은 너무나도 우리 말을 나보다 더 잘했던 것이다!
...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잘생긴 남자 배우의 액션과 매혹적인 여자 배우의 미소에 뒤로 넘어가면서, 만화 속 캐릭터에 울고 웃으면서 동시에 나는 그 성우들의 목소리들에도 빠져 있었다. '형사 콜롬보'와 '빠삐용'을 동시에 연기했던 고 최응찬의 구성짐이며, 리처드 버튼의 실제 목소리보다 더 외모에 어울렸던 유강진의 포스, 오드리 헵번의 미모만큼이나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넋이 나가게 했던 장유진, 미래 소년 코난의 씩씩한 목소리 손정아 등등이 펼쳐내던 그 음악같은 목소리의 향연을 어찌 잊으랴. 그 가운데 하나 고 장정진도 있었다.


![image.png](https://cdn.steemitimages.com/DQmX6iVk7SDYwavFEiXv686EFGR36UuxvwNUBVVrtGrz5P2/image.png)

그 목소리를 처음 기억했던 것은 '명탐정 번개'라는 애니메이션에서였다. 특이하게도 개들을 의인화시켰지만 그 뼈대는 셜록 홈즈에서 빌려 왔던 만화였다. (이를테면 홈즈에게 맨날 창피를 당하지만 끈질기고 뚝심있는 레스트레이드 경감은 불독으로 표현된다) 거기서 장정진은 명탐정 '번개'의 상대역인 악당 교수 역이었다. 언뜻 사악해 보이지만 품위가 있고, 망가지더라도 한 방은 있는 그런 캐릭터였는데 장정진의 목소리는 무척 어울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나는 재패니메이션은 아닌 코리아니메이션, '달려라 하니'에서도 실감나게 마주치게 된다. 털보 홍두깨 선생은 보다 더 선이 굵고 거친 목소리여야 한다고 여겼는데 회를 거듭하다보니 장정진 성우의 목소리는 경망스러우면서도 따뜻한 홍두깨에 멋지게 맞아 떨어져 갔던 것이다.

방송 일을 하면서 즐거웠던 몇 안되는 일 중의 하나는 어릴 적, 또는 청소년 기에 추억을 심어준 인물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만날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PD로서 이런 저런 얘기를 전하고 '큐!'를 던지는 쾌감은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스타 도네이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는 '장정진 선생님'과 마주하는 행운을 누리게 됐었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 장정진이오. 하는 그 목소리에 여고생처럼 화들짝하며 반발짝 뛰었다. "홍두깨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분과 한창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녹음이 끝나고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는데 항상 바쁘셔서 인사할 겨를도 없이 튀어나가시곤 했던 장정진씨가 나를 불렀다. "PD님 나 좀 보지."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렸을 때 장정진씨의 얼굴은 항상 만면에 웃음이 차고 넘치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목소리는 '달려라 하니'의 악역 나애리에게 훈계할 때의 그 나직한 저음.

"포장마차 (스타들이 포장마차를 열어 불행한 처지의 아이들을 돕는 컨셉의 프로그램이었음) 뒤에 혜연이 (도움 받는 아이)한테 PD가 돈을 전달하잖아. 애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그 돈 봉투에 키스를 하고 그러는 장면을 왜 넣었나? 연출인가?"
"아.... 네?? 연출은 아니고 걔가 좋아서 그런 거였습니다."
"연출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편집에서 그런 건 뺐어야 한다고 봐요. 물론 그 돈이 얼마나 귀한 줄은 알아. 걔 목숨값이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마음을 모아 준 거라고. 열 세 살짜리 여자애가 돈 봉투에 키스하는 걸로 고마움을 표현하는 거 나는 보기 좋지 않더라고. 암튼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응?"

한 방 맞았다 싶어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장정진씨는 언제 그랬나는 듯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돌아가서 "자 그럼 갑니다 씌우우웅" 하시면서 가방을 들고 문밖으로 사라지셨다. 테잎을 끼우고 마지막 장면을 다시 보니 아이가 돈 봉투에 키스하는 장면이 슬로우까지 걸려서 재탕되고 있었다. 내가 왜 저런 편집을 했지? 머리를 긁적이는데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마음을 모아 준 거라고....."하는 장정진씨의 기름진 목소리가 귓가에 잉잉거렸었다.

그로부터 1년 후 장정진씨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찰떡 빨리 먹기라는 어이없는 과제를 수행하다가 그만 질식하여 사경을 헤맨 끝에 2004년 10월 11일 오늘 세상을 떠나셨다. 예능 프로그램에 꽤 많이 얼굴을 보이셨지만 나는 지금도 그를 목소리로만 기억한다. 하니야 하니야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홍두깨의 목소리로, 그리고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마음을 모아 준 거라고." 하시며 서투른 PD를 나무라시던 그 목소리로. 홍두깨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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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lcock ·
아 그 분 이시기군요.
지금 시대라면 응급처치가 가능했을텐데 정말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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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junghoon ·
최고의 전성기때 돌아가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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