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산 전투와 중국인 by sanha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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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nha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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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 전투와 중국인
1279년 3월 19일 애산전투와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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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만큼은 재미없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다지 특출난 게 없지만 수호지도 나름 읽을만한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다.

읽다 보면 특이한 인물이 하나 등장한다.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 엄청난 부호이자 ‘대관인’(大官人)이라는 존칭으로 불리며 관리들 사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양산박의 지도자가 되는 급시우 송강, 표자두 임충, 호랑이 때려죽인 무송 등이 곤란에 처했을 때 신세를 졌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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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에서 눈에 불 켜고 잡으러 다니는 범죄자가 시진의 저택에 숨어들었다 해도 관리들은 시진의 집에 쳐들어가거나 시진을 겁박하지 못했다. 송나라 태조가 “반역의 죄가 아닌 한 죄를 묻지 않는다.”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린 집안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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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의 가문은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 화북 지역 일대를 다스렸던 다섯 왕조의 마지막 후주(後周)의 황실의 후예였다. 송 태조 조광윤은 바로 이 후주의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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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라고 해 봐야 수명이 개하고 비슷해서 20년이면 특별히 장수한 수준에 들고 웬만한 신하들은 왕조 몇 개 섬기는 건 기본이었던 혼란기였다. 어린 황제 시종훈이 즉위하자 휘하 장수였던 조광윤은 딴 마음을 먹었고 이를 눈치 챈 부하들이 황제 자리를 권하자 짐짓 거부하다가 부하들이 억지로 용포를 입혔을 때에야 비로소 “어 이러면 어떡하지?” 하는 쇼를 하면서 어린 황제에게서 ‘선양’을 받는다. 송(宋) 왕조의 시작이었다.

조광윤은 자신의 후대 황제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돌에 새겨 궁중 깊숙이 두었다. 이른바 ‘석각유훈’(石刻遺訓)이다. “충후함으로 전조의 자손들을 돌보고 (以忠厚養前代之子孫) 관대함으로 사대부들의 바른 기풍을 진작하며 (以寬大養士人之正氣) 다스림으로 백성들의 삶을 부양하라."(以節制養百姓之生理). 통일왕조 당나라가 군벌 때문에 망하고 툭하면 황제들이 휘하 군인들 손에 죽어나가는 역사를 봤던 조광윤의 송나라는 철저한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했고 선비들을 우대했다. 조광윤 자신 한 명의 사대부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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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문치주의를 강조한 덕에 국방력이 약화돼 거란의 요와 여진이 세운 금과 탕구트 족이 세운 서하에 얻어 터지고 막대한 공물을 바쳐 가며 평화를 구걸했다는 것도 일부 사실이고 끝내 금나라에 북중국을 빼앗기고 황제가 사로잡혀 적국에 끌려가는 미증유의 일(정강의 변)도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는 1279년 3월 19일 벌어진 애산 전투에서 완전히 그 이름이 끊길 때까지 그때까지 알려진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몽골 제국의 전면 공격을 수십 년 동안이나 막아냈던 나라이기도 했다.

몽골에 대한 남송의 저항의 역사를 보면 경외심까지 들 정도로 끈질기고 치열했다. 고려의 40년 항전은 솔직히 여기에 갖다 대면 무안해질 정도. 이 송나라의 저력은 전 왕조의 황실을 보호하고 함부로 의견 다른 선비들을 죽이지 않았던 포용력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애산 전투는 그 결말이자 하이라이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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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3년 몽골의 맹공을 무려 5년 동안이나 버티던 양양성이 무너졌다. 소설 <영웅문>의 주인공 곽정이 전사한 데가 바로 이 양양성이었다. 양양의 함락은 남송의 수도 임안을 뒤흔들었고 그때까지 ‘어떻게 되겠지’와 ‘존버’ 정신을 시대에 앞서(?) 구현하며 조정에 출근도 하지 않고 방에 앉아 첩들 끼고 귀뚜라미 싸움시키기에 골몰하던 재상 가사도가 뒤늦게 병력을 긁어모아 나섰다가 박살이 난 뒤에는 더 ‘어떻게 될’ 일도, 버틸 수 있는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대부를 우대한 것은 좋았지만 그 사대부를 가려 쓰는 것은 황제였다. 가사도 같은 사람들은 많았고 오히려 그들이 황제보다 더 많은 선비들을 죽였지만 아둔한 황제들에 비해 과분한 충신들도 많았다. 그 중 왕립신이라는 이의 마지막 다짐. “강남은 이미 땅 한 평도 남아 있지 않으니 조가(趙家:조씨의 나라, 즉 송)의 땅 한 조각이라도 찾아 죽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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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6년 원나라 군대는 임안성에 육박했고 어린 황제(恭帝)는 항복했다. 그러나 송나라 충신들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린 황족들을 들쳐업고 도망쳤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황제도 세우고 연호도 바꿔 가며 저항의 기세를 놓치지 않았다. 묘호가 있는 마지막 황제인 단종(端宗)이 열 한 살의 나이로 죽고 사람들이 흩어지려 하자 최후의 충신이라 할 육수부의 절규.

“도종 황제의 아드님이 아직 계시는데 어찌 달아나려 하는가. 옛 사람들은 한 명으로 중흥에 성공하셨다. 지금은 백관이 갖춰지고 사졸들이 수만 명인데 하늘이 송나라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어찌 나라가 아니겠는가.”

이들은 필사적으로 어린 황족들을 등에 업고 도망다니며 송나라를 지켰다. 단종의 뒤를 이어 일곱 살난 조병(趙昺)을 황제로 모셨고 (1278년 4월) 연호도 고쳤다. 상흥(祥興). 상서롭게 흥한다는 뜻이다. 반어법으로 봐야할지 절절한 기원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으나 상흥 연호는 1년 이상 사용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저항의 불씨를 되살리던 또 하나의 충신 문천상은 원나라군에게 사로잡혔다. 묘호조차 남기지 못한 마지막 황제 곁에는 육수부와 장세걸 정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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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년 6월 이 충성스런 도망자들은 천혜의 요새로 한 섬을 주목한다. 그곳이 애산(涯山)이었다. 그곳에 거처를 만들고 저항군을 모은다. 약 20만의 의병이 모였다고 하니 송나라의 마지막은 비참하나 초라하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전국에서 모여든 시씨 가문 사람들이 있었다. 300년 전 송나라 이전의 주나라 황족. 대대로 황제의 보호를 받았던 그들. 북송이 멸망할 때 황제가 금나라에 붙들려 가는 상황에서도 송나라의 국가적 보호를 받았던 시씨들이 수백년의 은혜를 갚겠다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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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항복한 송나라 장수로부터 “예로부터 천하를 통일하지 않는 제왕은 정통이 아닙니다.”라는 충고(?)를 듣고 뼈에 새기고 있던 쿠빌라이는 다시금 대군을 내려보내 손바닥만한 섬 애산을 공격하게 한다. 어차피 도망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애산의 송나라 조정은 전 함대에 진흙을 뒤집어씌운 뒤 결박한다. 절망적인 연환계. 배들을 묶는다는 것은 거대한 불쏘시개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다. 결사의 각오였다. 그 진흙은 불화살을 조금이라도 막아 저항의 시간을 늘리려는 용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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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군은 조급하게 들이치지 않고 애산을 철통같이 봉쇄한다. 식량은 고사하고 좁은 섬에서 나오는 물로는 20만 명의 갈증을 반의 반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송나라 군은 바닷물을 마시면서 버텼다. 마침내 원나라 군대가 공격을 개시한다. 그야말로 불꽃같은 전투가 벌어졌다. 최고위층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혼연일치가 돼 원나라 군에 맞선다. 황제 역시 배 위에 있었다. 마지막 충신 육수부는 관복을 갖춰 입고 황제에게 <대학> 강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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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은 원래 <예기>(禮記)에 속해 있었는데 주희(주자학의 창시자 그 사람)에 의해 사서(四書)의 일부로 지정된 것이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까지 성리학 이념을 충실하게 담은 이 책은 조선 왕조에서도 왕이나 세자가 충실히 익혀야 할 텍스트였다. 제왕학 교과서라고나 할까. 즉 마지막 순간까지도 육수부는 “황제의 덕목은 이러해야 하옵니다.”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든다. 황태후는 물에 빠져서 구출됐지만 황제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시 몸을 던졌다. 병사들 역시 싸우다가 하염없이 싸우다가 죽었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배에 구멍을 뚫고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279년 3월 19일이었다.


![1584600860_tiprichimage_421x599_148565.png](https://cdn.steemitimages.com/DQmQAVqhJZYEsA5s5CXxbYya8dEQVfAQDjao75bgavVGH27/1584600860_tiprichimage_421x599_14856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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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의 제실(帝室0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과거 문화사 , 진정 저 동아시아 출판사)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이토록 장렬한 최후를 맞은 왕조도 없을 것이다. 대개 왕조의 마지막 황제들은 목이 졸려 죽거나 자살을 하거나 죽느니만도 못한 삶으로 목숨을 부지했고 한나라든 당나라든 그 마지막은 보잘것없었지만 송나라의 경우는 달랐다. 송나라의 마지막을 보면 중국인들의 양 극단을 모두 엿보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실리에 밝고 대세에 순응하는 경향이 강하나 결국 그들은 애초에 ‘대의명분’을 만든 사람들이기도 한 것이다. 애산 전투에 나선 사람들 태반이 원나라에 항복한 중국인들이었다. “죽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나라 위한 일편담심 역사에 남기리라.”한 문천상도 “천하를 제패하지 않은 제왕을 어찌 제왕이라 하겠습니까.” 쿠빌라이를 부추긴 유정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한족(漢族)이 이민족 지배자에게 대륙 전체를 빼앗긴 것은 역사에 처음이었다. 북방의 이민족은 양자강을 넘어본 적이 없었고 남지나해를 바라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애산 이후 중국은 없다.”는 말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대송제국멸망사> (위즈덤하우스)의 저자 자오이 (趙益 )은 이렇게 일갈한다. “처음으로 이민족의 통치를 받게 된 중국은 뜻밖에도 그들에게 학교의 큰 문을 활짝 여는 결과를 가져왔다. 비할 수 없이 찬란한 문명과 넓은 가슴으로 이 빛나는 전당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을 교육시고 융화하여 옛 선현들이 바라던 ‘중국의 예법을 쓰면 중국인으로 받아들인다.’(來中國則中國之)는 이상적인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느끼는 ‘용광로 중화주의’에 대한 반감을 차치한다면 1279년 3월 19일 (양력) 벌어졌던 중국사적 전투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전의 역사가 담겨 쏟아졌고 그 이후의 역사를 다시 채우는 바가지같은 전투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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